01. 야, 우리 집에 공부하러 갈래? 유중혁은 삼십 분째 김독자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었기에 지나가던 한수영이 집에 우환이 있는 게 아니냐 물을 정도였다. 유중혁은 머리를 싸매고 천천히, 하나하나 고민하며 따져보기로 했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 당연히 김독자의 집이다. 분명 어머니와 둘이 산다고 한 것 같은데, 이 시간이면 집에 계시겠지. 공부는 도서관에서도 가능한데 굳이 나를 집으로 부르는 이유는 뭔가. 역시 어머니에게 나를 소개하려고? 그렇다면 이따위 몰골로 가도 괜찮은가. 뭔가 선물이라도 사 가야... 책상을 쿵 치는 소리에 유중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업 끝났어, 가자." 02. 답지 않게 당황하며 황급히 책가방을 챙기는 유중혁을 김독자는 미묘한 눈으로 내려..
- 샤콘느(chaconne): 곡의 처음부터 들려오는 비장한 주제 음악이 매우 슬프고 우울한 명곡. https://youtu.be/8QF1OWtRTVc *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했어. 우치하 오비토와 하타케 카카시의 고교 삼 년은, 이 말을 수 없이 속으로 되뇌었던 것이 전부였다.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 동안, 그들은 수백 번 대화를 나누고 수천 번 시선을 교환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고, 마음을 전해도 괜찮을지 머리가 터질 만큼 고민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세 번째 겨울이 끝날 무렵, 둘의 씁쓸한 외사랑은 아무런 결실 없이 끝을 맺었다. * * "하타케 씨는 애인 없어?" 하얀 머그컵을 들어 올리던 손이 멈췄다. 카카시는 컵의 반질반질한 표면을 말없이 ..
그래, 언제나 너는 소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의연하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네 뒷모습에선, 희미한 겨울의 향기가 맴돌았다. * 해진이 수린과 처음 마주한 건 언제였을까. 어둡던 그 겨울밤의 학교에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이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한창 벚꽃이 흩날리던 즈음이었다.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하고, 모두가 신학기의 설렘으로 들떠 있을 무렵. 그때 해진은 제 일만으로도 벅차 잠시 고갤 돌릴 틈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유난히 귀에 꽂히는 이야기가 있었다. '괴이 현상' 에 미쳐있다는 학생회장의 소문.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였을뿐더러,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었기에 들려오는 족족 무심히 흘려버렸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해진은 선생님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