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생에 우리는 무엇이었을까. 죽어 가는 너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골짜기에서 너와 아프게 이별한 적이 있었던 것일까. 너와 나 사이를 건너가고 건너오는 애틋함은 어느 생에서 여기까지 이어져 오는 걸까. /도종환, 연분홍 00. 아메, 아메 서머터지. 내가 너와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단 것쯤은 잘 알고 있어요. 네 목표, 사명을 완수하고 나면 날 두고 사라지겠죠. 그런데 나는요, 혼자 남고 싶지 않아요. 널 떠나보내고 싶지도 않아요. 이걸 알게 되면, 넌 분명 인간들마냥 이기적이고 한심하다며 날 경멸하겠죠. 그래도 괜찮아요. 네가 가는 곳이 어디든 곁에 있고 싶어요. 그렇다면 우리, 차라리-. 01. "... 에브루헨?"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브루헨은 고개를 퍼뜩 들었다. 무슨 생각을 ..
* 조용하고 평온한 오후였다. 살짝 열어둔 창문 틈으로 새어 들어오는 바람이 개나리색 커튼을 잔잔하게 흔들었다. 탁자에 올려둔 머그컵에선 따뜻한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혀가 녹을 것 같은 달콤한 코코아를 한모금 마시곤 옅게 미소지었다. 잔뜩 낡은 흔들의자에선 이따금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폭신한 방석을 의자에 깔아두곤 근처에 있던 담요를 끌어와 어깨에 둘렀다. 맑은 날 햇빛 아래 널어뒀던 담요는 포근한 봄 냄새를 풍겼다. 야옹, 의자 밑에서 연신 울어대는 고양이를 안아들어 무릎 위에 올렸다. 이내 조용해진 고양이는 자신을 쓰다듬는 그의 손길에 고롱고롱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그의 눈에 어젯밤 열심히 뜨다 잠들었던 반쯤 완성된 목도리가 들어왔다. 누군가에게 주려는 선물일까. 연분홍 실이 얽힌 뜨개..
* 오늘도 울고 있네요, 원더러. 겁을 잔뜩 집어먹은 토끼는 커다란 침대에 걸터앉아 몸을 작게 웅크린 채 훌쩍대고 있었다. 문을 빼꼼 열어 방 안을 확인한 후, 굳이 불을 켜지 않고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여신에게 버림받은 이 어린 양은 지치지도 않고 그의 대답을 기다린다. 네가 믿는 신은 널 떠났어요. 불쌍하게도. 부서져가는 펜듈럼을 꼭 쥐고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는 모양새가 꽤나 가엽고, 웃음이 날 만큼 사랑스러웠다. 있죠. 아무리 네가 괴로워해도, 신은 네게 답을 주지 않을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도와줄게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요." 여신이 버린 피조물이니, 저가 취한다고 죄가 되진 않을 터. 너를 내 것으로 만들고 싶어요. 나 이외의 그 어떤 것도 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끈적하고 추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