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언제나 너는 소문의 한가운데에 서있었다. 그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의연하게 앞으로 걸어나가는 네 뒷모습에선, 희미한 겨울의 향기가 맴돌았다. * 해진이 수린과 처음 마주한 건 언제였을까. 어둡던 그 겨울밤의 학교에서? 아니, 그보다 훨씬 더 전이었을 것이다. 겨울이 지나고 한창 벚꽃이 흩날리던 즈음이었다. 세상은 온통 분홍빛으로 가득하고, 모두가 신학기의 설렘으로 들떠 있을 무렵. 그때 해진은 제 일만으로도 벅차 잠시 고갤 돌릴 틈조차 없었다. 그 와중에도 유난히 귀에 꽂히는 이야기가 있었다. '괴이 현상' 에 미쳐있다는 학생회장의 소문. 생판 모르는 남의 이야기였을뿐더러,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었기에 들려오는 족족 무심히 흘려버렸다. 그렇게 또 얼마의 시간이 지나고. 해진은 선생님께 ..
* [재이야, 내일 우리 집 올 수 있어? 응, 기다릴게.] 그 축제에서, 네 생일을 물어본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너는 어떤 표정을 지었었지? 기쁘고, 또 조금은 놀란 얼굴이었지. 다른 사람 생일을 챙겨보는 게 얼마 만이더라. 챙기는 것도, 챙겨주는 것도 아직은 내게 조금 생소한 이야기. 이런 일이 익숙하지 않은 터라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무작정 네게 전화를 걸어 집으로 오겠단 약속을 받아냈다. 무얼 해주면 네가 가장 기뻐할까. 케이크랑, 네가 좋아하는 음식. 보고 싶다고 했던 영화. 그리고 선물. 잠자리에 누워서도 머릿속은 네 생일을 준비할 생각뿐이었다. 그렇게 디데이가 오고, 날이 밝자마자 옷을 껴입고 밖으로 나가 조금은 들뜬 발걸음으로 움직였다. 제과점에 들러 케이크를 사고, 네게 만들어줄 음..
* 늦은 시간, 구름 사이로 스미는 달빛이 한적한 놀이터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아진은 삐걱대는 그네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하얗게 나오는 입김을 바라보며 발장난을 하다,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쭉 폈다. 지금쯤 마쳤으려나. 차가운 밤공기에 빨갛게 얼어버린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서성였다. 때마침 저 멀리서 점점 다가오는 인영을 발견하고, 아진은 팔을 들어 올려 손을 크게 흔들었다. "많이 기다렸어? 추웠겠다..." 반가움에 총총대며 뛰어가 재이를 끌어안고 품에 얼굴을 부볐다. 문득 외투를 걸치지 않고 달랑 교복 차림인 그를 보고, 아진은 두르고 있던 제 아이보리색 목도리를 풀었다. "재이야, 조금만 숙여볼래?" 순순히 하라는 대로 허리를 숙여 아진을 바라보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