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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콘느(chaconne): 곡의 처음부터 들려오는 비장한 주제 음악이 매우 슬프고 우울한 명곡. 
https://youtu.be/8QF1OWtRTVc

 *

 너를 좋아해. 너를 좋아했어.

 우치하 오비토와 하타케 카카시의 고교 삼 년은, 이 말을 수 없이 속으로 되뇌었던 것이 전부였다. 짧다면 짧았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 동안, 그들은 수백 번 대화를 나누고 수천 번 시선을 교환했다. 셀 수 없이 많은 밤을 지새웠고, 마음을 전해도 괜찮을지 머리가 터질 만큼 고민했다. 그러나 단지 그뿐이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세 번째 겨울이 끝날 무렵, 둘의 씁쓸한 외사랑은 아무런 결실 없이 끝을 맺었다.

 * *

 "하타케 씨는 애인 없어?"

 하얀 머그컵을 들어 올리던 손이 멈췄다. 

 카카시는 컵의 반질반질한 표면을 말없이 문지르고만 있었다. 반쯤 남은 커피가 잔 안에서 작게 일렁였다. 무심코 던진 질문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동료 사원은 머쓱한 듯 말을 얼버무렸다. 왜, 요새 빨리들 결혼하잖아. 내 친구는 벌써 애가...

"그런 거 없습니다. 결혼에도 관심 없고요."

 다 식은 아메리카노를 목구멍으로 흘려보냈다. 미지근한 커피에선 진부한 맛이 났다. 혀끝에 남는 씁쓸함에 입을 두어 번 다시곤, 들고 있던 컵을 요란스레 내려놓았다. 피곤한 얼굴로 기지개를 켜며 카카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거래처에 잠깐 다녀옵니다. 중요한 계약 건이라 그런지 부장님이 요새 좀 예민하셔서.
 괜한 걸 물었나, 싶은 얼굴로 머리를 긁적이는 그녀를 뒤로하고 카카시는 천천히 움직였다. 오늘따라 왠지 몸이 무거웠다. 커다랗고 무거운 추에 눌리는 기분이었다. 방금 전까진 괜찮았는데. 이상하네, 하고 중얼거렸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는 짜증스러울만치 꾸물거렸다. 차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들이 슬로비디오를 틀어놓기라도 한 것 마냥 느릿느릿했다. 잡음이 섞여 지지직거리는 라디오의 볼륨을 줄였다. 귀에 익숙한 뉴에이지의 멜로디가 점차 작아졌다. 내비게이션에서 흘러나오는 낭랑한 음성 위로, 아까 들은 질문이 문득 귓가에 맴돌았다.

 연인, 연애, 결혼. 

 오후 내내 컨디션이 한없이 가라앉던 것은, 그 말을 들었을 때 무의식중에 고교 시절의 그 녀석을 떠올렸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리운가? 자신에게 물었다. 그런 것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쾌활하게 웃던 녀석의 얼굴이 여즉 눈에 선했다. 마음 깊숙한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렸다. 점심시간에 마신 커피가 단단히 체한 것 같았다. 멀미가 날 것 같았다. 눈꺼풀을 깜빡일 때마다 빛바랜 계절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나 벌써 십 년 전의 일이었다. 스물아홉살의 하타케 카카시에겐 과거보다 눈앞에 닥친 현실이 중요했다. 지금은 그저 일에만 집중하고 싶었다. 바라왔던 직장이었고, 하고 싶었던 일이었으니까.
  
 근처에서 울리는 경적 소리에 카카시는 브레이크를 밟았다. 하마터면 목적지를 지나칠 뻔했다. 쓸데없이 감상적인 기분이 되었다고 생각하며 쯧, 혀를 찼다. 적당한 곳에다 대강 주차하고 눈앞에 보이는 무채색 빌딩으로 향했다. 히터를 벗어나니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이제 봄인 줄 알았는데. 삼월 초의 찬바람에선, 아직 겨울의 냄새가 났다. 카카시는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입김을 바라보며 회색 롱코트를 꼭 여몄다.

 건물의 입구는 회전문으로 되어있었다. 적당한 세기로 밀며 천천히 걸어가다 타이밍에 맞춰 나와야 했다. 마치 제 인생 같다고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걸음을 옮겼다. 조용한 로비에 울리는 자신의 발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버튼을 눌러두고 멍하니 층수가 표기되는 부분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때, 저 멀리서부터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카카시의 뒤에 우뚝 멈춰 섰다. 기다란 인영이 카카시를 덮었다. 머릿속이 뱅글뱅글 돌아가고 있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뇌는 끊임없이 경보음을 울려댔다. 카페인 때문일까, 아니면 최근 유행한다던 감기 바이러스 탓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나른한 기운이 저를 감싸는 걸 느끼며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너무나도 낯설었지만, 꽤나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카카시는 제 눈을 의심했다. 삐죽삐죽 뻗친 머리 탓에 자칫 소년으로 보일 법한, 새까만 눈동자의 남자였다.

 느긋한 정적을 깨고 먼저 인사를 꺼낸 건, 제 앞에 서있는 우치하 오비토였다.

 "... 오랜만이네, 카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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