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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독시/중혁독자

[중혁독자] 초대

뽀솜 2018. 11. 7. 18:09
01.

 야, 우리 집에 공부하러 갈래?

 유중혁은 삼십 분째 김독자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너무나도 진지하고 심각한 얼굴이었기에 지나가던 한수영이 집에 우환이 있는 게 아니냐 물을 정도였다. 유중혁은 머리를 싸매고 천천히, 하나하나 고민하며 따져보기로 했다. 우리 집은 어디인가. 당연히 김독자의 집이다. 분명 어머니와 둘이 산다고 한 것 같은데, 이 시간이면 집에 계시겠지. 공부는 도서관에서도 가능한데 굳이 나를 집으로 부르는 이유는 뭔가. 역시 어머니에게 나를 소개하려고? 그렇다면 이따위 몰골로 가도 괜찮은가. 뭔가 선물이라도 사 가야... 책상을 쿵 치는 소리에 유중혁은 퍼뜩 고개를 들었다.

 "수업 끝났어, 가자."


02.

 답지 않게 당황하며 황급히 책가방을 챙기는 유중혁을 김독자는 미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딱히 별 뜻은 없었다. 지나가다 본 유중혁의 중간고사 성적이 처참했고, 조금 도와줘 볼까. 생각했던 것이 전부이다. 좀 전부터 고뇌하고 있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알 만했다. 조금 놀려주고 싶었으나 다신 집에 놀러 가지 않겠다고 말할 것 같아 이내 그만두었다. 집에 친구를 데려오자 엄마는 꽤 놀란 눈치였다. 내가 그렇게까지 친구가 없었던가? ... 없었구나. 김독자는 빠르게 인정하고 유중혁을 방으로 안내했다. 책꽂이에서 참고서 몇 권을 꺼내 동그란 좌식 책상 위에 올려두고, 유중혁에게 바닥에 앉으라 눈짓했다. 딱 혼자 사용하기 알맞은 크기의 방이었기에 건장한 남고생 둘이 들어오니 조금 좁은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중혁은 정좌한 채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자세히 보니 식은땀도 흐르고 있었다. 김독자는 웃음을 참고 선풍기를 틀었다. 침묵이 흐르는 방에 선풍기가 달달거리며 회전하는 소리만이 울렸다. 

  "... 수학부터 하자. 184쪽 펴봐."


03.
 
 솔직히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불가항력적으로. 유중혁은 책에 어지러이 나열된 숫자 대신 김독자의 얼굴만 보고 있었다. 김독자가 이를 지적하면 적반하장으로 화를 낼 셈이었다. 당연한 것 아닌가. 유중혁은 쉴 새 없이 자기합리화를 시도하며 마음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애인이 얼굴을 들이밀고 눈앞에서 조잘조잘 떠들고 있는데, 아무렇지 않을 이가 어디 있지? 미안하지만 김독자가 뭐라고 말하고 있는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깜빡이는 눈동자 위로 드리워진 속눈썹이 오늘따라 더 긴 것 같았다. 나름 열변을 토하고 있었기에 볼도 상기된... 듯하고. 입술도, ... 젠장. 정신없이 책과 김독자의 얼굴을 번갈아 힐끔대던 유중혁은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만 책상을 엎을 뻔했다. 

 "과일 먹으면서 하렴. ... 왜 서 있니, 중혁아?"

 "아, 아닙니다..."


04.

 김독자는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몰래 허벅지를 찌르며 꾹 참았다. 귀까지 빨개진 채 엄마가 두고 간 과일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만 있는 유중혁이 너무나도 귀여웠다. 처음부터 책 대신 자신의 얼굴만 쳐다보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고, 부러 모르는 척하며 더 열심히 문제를 풀고 있었다. 결국 김독자는 스멀스멀 올라오는 장난기를 더 이상 참을 수 없었고, 천천히 일어나 보란 듯이 달칵, 문을 잠갔다. 급기야 눈이 핑핑 돌기 시작하는 유중혁을 보며 자리에 앉아 헛기침을 했다. 중혁아, 있잖아아... 은근한 눈빛으로 말꼬리를 길게 늘이며 몸을 가까이했다. 설마 이 자식이 집을 뛰쳐나가는 건 아닐까 좀 걱정이 되었다.

 "우리 사귄 지도 좀 됐고, 그치이?"

 "... ..."

 아무 말 못 하고 입만 벙긋대는 유중혁이 불쌍하기까지 했다. 너무 과했나? 피식 웃으며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찰나, 유중혁이 펜을 쥐고 있는 손을 끌어당기며 입을 맞대왔다. 말랑한 감촉을 느낄 새도 없이 입술이 떨어졌고, 정신을 차리자 유중혁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 다음에는 집이 빌 때 불러야겠다고 김독자는 굳게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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